즐겨찾기 추가 2020.12.03(목) 13:33
전체기사 탑뉴스 정치 행정 경제 국제 사회 국방 자동차 종교 교육 IT/과학 벤처/스타트업 농수산 건설/부동산 핫이슈 지차체뉴스 산업 포토뉴스
인물
연예
영화
음악
공연
학회/전시회
세미나
디자인/건축
미술/사진
박물관/문화재
출판
English 日文 中文

자유주의자들을 위한 저작 소개C : 발터 오이켄의《경제정책의 근본원리》

2020-11-07(토) 06:11
[신동아방송=권병찬 기자] 오래전 19세기 서구유럽으로 다시 가 보시자 ! 19세기 들어 세계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문을 걸어잠그던 ‘중상주의’에서 애덤 스미스가 제안한 ‘자유방임의 지배’로 전환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1873년 시작된 세계 최초의 ‘대불황’이 23년간 지속되자 보호주의로 회귀했고, 이는 제국주의로 이어졌다. 이후 대공황(1929년)과 세계전쟁이 덮치자 세계는 하늘의 빛 자유주의를 억압한 채 뉴딜정책 같은 개입주의로 치달았다.

경제원리에 무지한 정치꾼들이나 무대 쇼 업적 기만술에 밝은 권력자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소위 ‘뉴딜 정책’은 단 꿀이다. 하지만 경제원리에 천착한다면 뉴딜정책이 가진 문제점들이나 후폭풍들은 기자에게는 사악한 독으로 보인다. (발터 오이켄 이후 후술로 소개 예정 : 뉴딜정책 무엇이 문제였던가?)

더불어 중국 공산당의 개입으로 현재 발생한 한국의 부정선거나 지금 막 발생한 미국 대선의 부정선거 의혹의 미 대법원 행은 경제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기자로 하여금 자유주의의 또 한 줄기 빛 ‘발터 오이켄’으로 더욱 향하게 하고 있다.

왜일까? 윤석열 검찰총장이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는 검찰제도의 본질은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생각해야 하며 이는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 즉 ‘검찰제도는 권력위선자들에게 있지 않고 국민에게 있다’라는 언급, 즉, 개판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속에서도 국민의 빛을 찾아 세상을 평온하게 만들 의무를 강조한 것이라던지,

현재 정상적인 국민들을 개돼지화 하는 작업이 결말인 ‘대책없어 해체주의’를 사냥개로 삼고 미국 선거제도 자체의 뿌리를 뒤흔들어 버린 중국공산당과 연계된 현재의 미국 민주당, 그 하수인들의 무뇌아적 폭력들, 사기들이 본질적으로 옛 개판에서 시작된 나찌의 전체주의적 사기와 거짓 ,폭력과 난동들의 근원적 본질과 그 악마성이 동일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 뿐만 아니라 왜 이런 세계적 혼란이 발생하는 것일까? 미국 선거제도를 아무리 뜯어 보아도, 한국의 부정선거를 아무리 파 보아도 그 원인은 중국공산당과 전체주의의 무지함, 사암함, 거짓선동들, 사기들이며 기자의 눈에는 사람들이 미 민주당의 위선이나 무지하고 위선적인 미국 메이져 기래기 미디어 매체 (예: CNN, 뉴욕 뒷골목 타임즈)선동의 멍청한 마약에서 깨어난다면 점점 밝혀지고 드러날 것이라고 보인다.

“오이켄 할아버지 부디 한 말씀 하소서! 멀쩡한 사람들을 무뇌충 개돼지로 낙인찍고 자신들이 개 돼지들이면서 사악한 욕망으로 사람처럼 행세하는 저 불쌍한 악마들을 위해서! 아니 더러운 권력욕으로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해체주의의 ‘뽕’ 세례를 맞고 애미 애비 형제 자매도 없고 남녀구분도 없는 저 동성애자들의 난동 사기꾼들에게! 사기와 위선의 가면을 쓴 저 권력 무뇌아들에게! 오죽하면 우리의 한 가수가 테스형을 부르리요?”

오이켄 할아버지가 말씀 하셨다. “퇴조하던 자유주의를 부활시킨 주역은 독일(서독)이었단다. 미국이나 영국보다 자국내 전체주의로 인한 파괴와 절규의 악마성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미제스, 하이에크 선배에서 나(발터 오이켄)로 이어지는 한줄기 ‘사상적 밝은 빛’은 ‘질서 자유주의’로 이어지며 결국 내 조국 서독 경제부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단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독일은 1948년 화폐개혁 후 ‘질서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나중 대처와 레이건 시대인 1980년대 초에야 ‘신자유주의’로 회귀한 영국과 미국보다 30여 년이나 빠른 행보였단다.”

기자는 오늘날의 정치와 경제문제들을 생각하면서 더욱 간절하게 미제스, 하이에크, 발터 오이켄 등으로 이어지는 이 자유주의의 할아버지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오늘날 우리 문제들을 다시 들여다 본다면 어떤 말씀들을 쏟아낼 것인가?

'라인강의 기적' 이끈 질서자유주의

독일 질서자유주의의 이론적 틀을 제공한 경제학자가 발터 오이켄(1891~1950)이다. 2차 대전 종전 후 정부 역할을 중시하는 케인스경제학이 득세하던 시기에 독일은 오이켄 등이 주창한 프라이부르크학파의 질서자유주의를 채택했다. 결과는 ‘라인강의 기적’이었다. 오이켄 사후 2년 뒤 발간된 《경제정책의 원리》는 그의 통찰이 집대성된 경제학의 정석 고전이다.

오이켄은 독일 경제의 ‘정신적 아버지’로 불린다. 질서자유주의의 핵심 명제는 “경제정책은 안정된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어야 하며, 결코 시장 과정에 자의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이켄 등장 전 독일과 유럽에선 ‘강단 사회주의자’ 구스타프 슈몰러(1838~1917)로 대표되는 ‘역사주의 경제학’이 대세였다.

역사학파는 ‘모든 사회에 적용되는 보편적 이론은 존재할 수 없다’며 규제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후진국 독일을 영국 같은 산업국가로 만들려면 자유무역론이 아니라 보호무역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나치 경제정책에 기여한 역사주의가 나치 지배의 종료로 힘을 잃자, 독일은 오이켄에 주목했다. 오이켄의 《경제정책의 원리》는 강하고 제한된 정부에 의한 ‘질서 정책’이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시장원리를 잘 작동시키는 전제조건인 경쟁질서의 틀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에 한해 정부 개입을 허용하고, 투자 생산 소비 등의 ‘경제 과정’은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한다.”

질서자유주의는 정부가 확립해야 할 ‘질서의 범위’에서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와 구별된다. 애덤 스미스는 정부는 사법질서 하나만 확립하면 족하다고 했다. 그외 일체의 정부규제를 없애면 하느님이 만든 효율적 시장경제질서가 형성될 것이라고 봤다.

반면 오이켄은 심각한 독점이나 특권집단의 준동에 주목하고 “사법질서뿐 아니라 경제질서도 정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오이켄의 방점은 어디까지나 <규제 최소화>에 있었다.

이를 ‘중도’라는 타이틀로 악마에게로 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와서 케인즈 빈머리로 대책없이 국민의 염원을 망치고 있는 김종인 같은 썩은 정치철새 노인네들, 타이틀만 하버드인 준석 동무, 나이 오십대에 아직도 아리까리한 친구 하태경 동무, 아침에 짹짹거리는 철수 참새 아찌들은 새겨 들어야 한다고 기자는 본다.

오이켄 그는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정부 역할은 통화안정, 개방적 시장, 사유재산제, 계약 자유, 자기책임의 원칙 등의 유지로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지 투자 분배 고용 같은 목표를 세우고 사안별로 ‘시장 과정’에 개입하는 간섭주의는 빈곤과 실업이라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란 설명이다.

오이켄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경제체제를 구분하는 것을 “매우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했다. 왜? 경제는 논리가 아니라 원리니까! 자원과 재화를 언제 어떻게, 무엇에 사용할지 계획을 세우는 주체가 ‘국가’냐 ‘가계와 기업’이냐에 따라 중앙관리경제와 교환경제(시장경제)로 분류해야 한다는 경제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주장을 중요시해야 한다.

그는 “나치하 독일 경제와 혁명 이후 소련 경제를 포함한 사회주의 경제는 중앙관리경제라는 점에서 동일한 경제질서”라고 진단했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고 사회 정의와 경제 안정을 달성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진짜 동인’은 끊임없는 권력욕이라고 간파한 것이다. “내재적 모순 탓에 중앙관리경제는 지속되지 못하며, 거의 유일한 존재이유인 ‘평등’ 달성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국가 의무는 '자유의 질서' 보호오이켄의 《경제정책의 원리》는 부분적·사안별로 시장에 개입하는 케인스식 ‘중도 경제정책’도 작동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케인스는 투자 부족이 문제라며 적자 재정, 저금리 및 신용 확대를 처방했지만, 오이켄은 가격 동결, 환율 조작, 금리 규제 같은 미시적 규제는 ‘가격 기구’를 파괴하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1960~1970년대에 세계 각국이 케인스의 총수요 확대 정책을 따르다 스태그플레이션과 맞닥뜨렸다는 점에서 그의 진단은 빛을 발했으며 그점이 옳다라는 것도 확실히 증명됐다.오이켄은 “집단이기주의 행태를 간과하지 말라”며 민간 단체를 정책 결정에 참여시키는 일의 위험도 경고했다.

기업 간 ‘동업 조합’이나 노동자 간 ‘직능 노조’ 같은 민간 단체가 끼면 경제는 정치 투쟁의 장으로 변질된다며 의견은 듣되 정책 결정에는 철저히 배제할 것을 주문했다. “집단은 양심이 없다. 더 정확히는 어떤 경우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 책은 다양한 자유주의적 경제질서를 통해 세계가 발전해왔음을 보여주는 명징한 기록으로도 읽힌다. 세계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일깨워준다. “어느 한 부분이 붕괴되면 연쇄반응에 의해 자유의 질서는 급격히 훼손된다. 국가는 항상 전체 질서의 틀로서 사고하고 행동할 의무가 있다.”

우리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정치,사회적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 야당의 현재의 한심한 모습, 사기와 위선에 가려져 진심을 알리지 못하는 저 세계 최강대국의 선거부정의 모습들을 보면서 발터 오이켄을 다시 생각한다.

기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투표지에 ‘워터마크’를 새겨놓은 것을 보면서 그도 발터 오이켄을 다시 생각하고 있음을 추정한다. 맑은 밤하늘의 밝은 별빛아래 기도하면 다 통하니까! 아! 기자도 테스형!

발터 오이켄은 누구인가?


"시장경제에서 심판인 정부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결과는 그의 死後에 발간된 대표적인 저작 「경제정책의 근본」(Grundsatze der Wirtschaftspolitik)에 있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에 결집되어 있다.

『정부의 경제정책은 안정된 질서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어야 하며, 결코 시장경제 과정에 恣意的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

발터 오이켄은 1891년 1월17일 독일의 예나(Jena)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루돌프 오이켄(Rudolf Eucken)은 예나대학교의 철학과 교수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해설가이자 윤리학과 종교에 대한 저술가였으며, 19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오이켄의 어머니 이레네 오이켄(Irene Eucken)은 미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젊은 오이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예술에 대한 오이켄 가족의 관심은 오이켄이 17세 때 호들러(F. Hodler)가 그린 예나대학교 대강당 벽화의 중심 모델이 되는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이 벽화는 1813년 나폴레옹에 항거한 해방투쟁에서 학생들의 활약상을 그린 「예나 학생들의 궐기」라는 그림이다. 고향인 예나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이켄은 대학에서 史學과 經濟學 중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고민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로 古代 경제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가 경제학 관련 서적들을 접하면서 생긴 진로에 대한 고민이었다.

결국 그는 경제학을 선택하고 킬(Kiel)대학과 본(Bonn)대학을 거쳐 예나대학을 졸업한다. 흥미롭게도 史學과 경제학에서 택일을 고민하던 그가 경제학을 택하고, 훗날 歷史學派에 대한 비판의 선봉에 서게 된다. 졸업 후 오이켄은 다시 본으로 가서 그의 나이 22세 때인 1913년에 최고점수를 받으며 박사학위를 받는다. 곧바로 軍에 입대한 그는 제10 바이에른 야전포병연대에서 장교로 복무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고 1918년까지 戰場에서 보냈다.

오이켄이 부인인 에디트(Edith Eucken-Erdsiek)를 만난 것은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슈마허(H. Schumacher)가 주관하던 한 세미나에서였다. 당시 29세였던 오이켄은 슈마허 교수의 조교로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학사와 철학, 경제학을 공부하던 25세의 에디트가 자신이 작성한 리포트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녀는 모르겐슈테른(Ch. Morgenstern)의 말을 인용하면서 발표를 마치는데, 세미나가 끝난 후 오이켄이 다가와 『아까 그 인용구, 누구의 말이죠?』라고 물어본 것이 서로 사귀게 된 단초였다고 한다.

약혼식 날 오이켄은 약혼녀인 에디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열심히 하면 학자로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신은 공부는 좀 하지만 학자가 될 정도의 재능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경제학자로서 효율적인 자원배분과 分業을 제안한 것일까? 아무튼 에디트는 그 이후 학문에는 뜻을 접고 남편을 內助하는 일에만 전념한다.

歷史學派와의 결별

독일에서 리스트(F. List) 이래 로셔(W. Rocher), 힐데브란트(B. Hildebrandt), 크니스(Knies) 등으로 이어져온 歷史學派는 리스트의 경제발전단계說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경제는 반드시 일정한 단계를 거쳐 발전하게 되며, 각 민족과 경제발전의 相異한 역사적 단계에 따른 相異한 경제학과 경제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근본적인 원리적 이론을 부정하면서 경제학의 국민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러한 역사주의는 슈몰러(Schmoller)에 이르면, 경제학은 거의 전적으로 經濟史와 통계에만 의존하면서 하나의 이론체계를 수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들의 국민주의적 성격과 국가규제 중심의 경제정책론은 自意든 他意든 나치의이념과 정책에도 적잖은 기여를 하게 된다.

특정시기와 특정단계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이론을 인정해야 한다면 이는 결국 끊임없이 급속하게 변화하는 경제환경 속에서 이론이 현실을 뒤좇아가기만 하면서 事後 설명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된다면 경제운용의 방향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정책의 適否(적부)를 판단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오이켄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들만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기만 하던 歷史學派들이 현실 경제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도 찾지 못한 채 헤매다가, 이제는 위험천만하게도 증명도 되지 않는 발전단계 假說(가설)로 도망치고 있다고 질타한다. 「피곤해진 後期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주장 등은 무언가 유식한 냄새를 풍기는 단어들을 채용하여 멋있게 장식한 추측에 불과하며 고상한 척하는 사기행위이고 아주 세련된 선전선동의 속임수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한다.

오이켄이 歷史學派에 대해 처음부터 비판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이켄의 박사과정과 교수자격 논문의 지도교수인 슈마허는 歷史學派의 일원이었으며, 당연히 오이켄의 논문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오이켄은 종종 위 두 개의 논문, 특히 교수자격 논문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되뇌곤 했다.

오이켄의 생각에 변화를 준 커다란 사건 중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발생한 마르크貨의 엄청난 가치하락이었다. 통화의 가치가 끝도 없이 추락하는 현상에 대해 歷史學派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국제수지의 赤字(적자)가 물가상승의 원인이므로 관세 장벽을 쌓아 自國 산업을 외국 산업의 경쟁으로부터 지키는 보호무역을 실시해 赤字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오이켄은 이 문제는 通貨이론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1923년 자신의 첫 번째 학문적 성과인 「독일 화폐문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국제수지 赤字 자체가 通貨증발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국제수지의 赤字가 물가상승의 원인이라고 보는 歷史學派의 견해를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또한 국민경제가 부작용 없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화폐의 가치를 안정적화폐가치의 안정과 중앙은행의 독립에 대한 그의 견해는 차후 전쟁보상 문제는 물론 연방은행의 설립 등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근본적인 정책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독일 연방은행의 독립성과 마르크貨의 안정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이는 오이켄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영국 경제가 휘청거리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오이켄의 생각과 이론은 歷史學派에 속해 있는 슈마허와는 당연히 대립하게 되었다. 오이켄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저는 슈마허 교수의 입장이 절대적으로 근거가 박약하며 실제로도 매우 불행한 것이라고 봅니다. 저와 교수가 이번에 서로 논쟁을 한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 서로 간에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우리는 완전히 갈라섰습니다』

슈마허 교수와 오이켄의 관계는 이것으로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인연은 또 한번 이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오이켄은 독일 대표단의 일원으로 점령지역 경제정책에 관한 논의를 위해 영국에서 파견된 행정관들과 만나게 된다.

회의가 시작되자 행정관들 중 영국의 노동당을 대표하여 참석한 사람이 아주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점령지역에서의 해외교역에 관해 상세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으며, 수입과 수출의 품목과 수량까지도 철저하게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오이켄은 곧바로 반박한다. 『방금 전 당신이 말씀하신 내용은 아주 흥미롭군요. 왜냐하면 방금 하신 말씀이야말로 현재 여기에 어떤 국민경제적 질서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자신이 정말로 무지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말씀이니까요』 그러면서 오이켄은 가격체계도 부실하고 시장도 아직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물건을 얼마만큼 수입하고, 또 어떤 것은 얼마만큼 수출해야 올바른 것인지 판단하는 당신의 결정이 옳은 결정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

행정관이 『자꾸 이론을 들먹이지 마시오. 우리 영국에서는 그렇게 합니다』고 하자 오이켄은 다음과 같이 쏘아붙인다. 『그러니까 영국 경제가 하루가 멀다하고 휘청거리는 것 아닙니까』

기자는 말한다. 옛 젊은 청년시절 한열이가 데모하다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기자는 그때의 노태우, 전두환 정권에 열심히 저항하던 때였다. 비록 당시에는 적이자 원수이지만 기자는 전두환 대통령이 정말 잘한 한 가지를 말하고 싶다.

비록 쿠데타로 집권한 그였지만 그는 경제부총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경제를 잘 몰라,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 이 말은 오히려 잘 모르니까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그 덕택에 우리는 최초로 자가용 자동차도 가지고 아파트들도 가지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공과 과,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도 문제지만 지금 경제가 폭망하고 있는 시점에서 기자는 정권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좀 모르면 건드리지마! 제발 좀 모르면 건드리지 말란 말이야 ! 선무당들아 ! 왜 삼성이 떠나려하고 왜 부총리가 사의를 표명하겠니? 진정 베네수엘라 거러지들 나라로 가고 싶은가?”

소개글을 마치면서 기자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에필로그> : 매니큐어 닭발 신임 소대장 김소위

붉은 하늘 군대 김종인 소위는 그 무지막지한 대깨문들의 시기와 질투들을 뚫고 문 대령의 작전참모 부관으로 임관, 소위계급인데도 불구하고 막중한 전투임무를 부여 받게 되었다. 그는 정치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 경제대학 RT 출신 장교였기 때문이다.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 하건만, 저 아래 세상에서 금수저로 태어나 한평생 변방에서 경제먹물만 편안하게 먹어온 그는 하늘군대에서도 편안하게 살아야 했기 때문에 무소불위, 오만불손의 경제사기의 칼로 옆에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머저리들을 가감하게 날려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무지한 개,돼지 백성들을 어떻게 빨아먹고 요리해 먹나?라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부대의 오너 문 대령에게 김 소위는 속을 감추고 삼고초려해서라도 데려올만한 생각이 젊은 참모였다.

결국, 김 소위는 기름지고 푸르게 넓은 동산을 문대령이 점령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권력이라는 속성, 그것은 사실 더러운 것이다. 하루는 승리한 공들을 나누는 잔치들이 즐비하게 이어지던 자리에서 김 소위는 실수를 했다.

오너 문대령을 위해 안주로 닭발을 시키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안주”라며 한 점 문 대령에게 권했는데 ‘으미 나온 접시의 닭발들 중 닭발가락 한 개에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는 것’ 아닌가?

문 대령의 속은 미식미식했고 “이게 무언가?”하며 크게 놀래 버렸다. 이일로 김 소위는 부대에서 쫓겨났다. 결국 그가 갈 곳은 저 미친 적진 푸른 미래통합 부대 밖에 없었다. 또 김 소위는 잔머리로 한자리 찾아 앉아 부대이름을 ‘국민의힘’으로 바꾸며 이번에는 주 대령 밑에서 전투소대장의 임무를 부여 받았다.

새로 부임해온 소대장 김소위를 하상병, 이상사, 홍일병은 믿음이 가지 않았다. 특히 독도법을 머리 깨지면서 익힌 홍일병은 가장 김 소위가 이상했다. “야전 훈련을 받은 소대장이 아니라 펜만 굴리다왔다 카던데 믿을 수 있을까? 설마 오이켄 독도법을 모를까? 그래도 소대장님인데?”하는 요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김소위가 소대원들을 집합시켰다. 그날은 주 대령의 명령으로 소대 독도법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말년이 다되어가는 하상병의 귓가에 작곡가 김영동의 ‘어드메로 갈거나? 어드메로 갈거나?’라는 노래가 들리는 어느 새벽

김 소위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렸다. “전원 완정군장에 집합. 아그들아 오늘 독도법 훈련 알제!” “예”

김소위와 소대원들은 무거운 군장들을 지고 고지로 더운 여름 땀나게 오르기 시작했다. 겨우 고지근처까지 올라 5분간 휴식 구름과자 시간에 지도를 보던 김 소위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김소위가 말했다. “야들아 좀 이상하데이, 이 고지가 아닌가부ㅕ”
그러자 소대원들은 전원 쓰러져버렸다.

한참 후 무거운 군장들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지를 내려온 김 소위와 소대원들은 옆의 고지를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 고지는 더 높았다. 고지 꼭대기를 점령하자 지도를 보던 김소위의 표정이 또 이상했다. 김 소위가 말하자 소대원들은 이번에는 영영 다시 못일어날 정도로 뻗어 버렸다. 김 소위가 한 말은 “야들아 아까 그 고지가 맞는가부ㅕ”였다.
권병찬 기자 kbc77@hanmail.net
        권병찬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회사소개회원약관개인정보보호정책공지사항제휴문의광고문의기사제보
사명:(주)신동아방송 강원방송 / 등록번호:서울 아02766 / 최초등록일:2013 년 5월 26일 / 제호:신동아방송·SDATV / 발행인·편집인:이신동
본사:서울특별시 서초구 강남대로2길 70 (양재동) / 홈페이지:www.sdatv-gw.co.kr
전화:(02)846-9300 / 팩스:(0505)300-8014 / 이메일:sdatv@sdatv.co.kr / 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책임자:이덕기
(주)신동아방송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 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