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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들을 위한 저작 소개, 하이에크의 ‘법, 입법 그리고 자유’, ‘노예의 길’

2020-10-28(수) 16:36
[신동아방송=권병찬 기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가 쓴『법, 입법 그리고 자유』는 자유주의를 오늘날의 문제의식에 맞게 재정립하여 자유사회의 기본원리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저작이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인류가 평화롭게 번영을 누리면서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유, 자생적 질서, 법의 지배 그리고 제한적 민주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저자 하이에크가 자신의 저서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사회는 국가의 계획과 규제가 없이도 ‘스스로 창출되는 복잡한 질서’ 또는 자생적 질서라는 것이다. 빈곤, 고용, 성장 그리고 양극화 등과 같은 경제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질서다.

자유사회의 자생적 질서를 붕괴시키는 것은 법에 대한 잘못된 인식, 법의 지배원칙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하이에크는 그런 오해를 밝혀내고 자유사회의 기반이 되는 자유의 법철학을 새로이 개발하고 있다.

그는 자유주의와 양립하는 정의의 개념을 개발하면서 이른바 ‘사회적 정의’(또는 분배적 정의)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경제는 소위 허무맹랑한 좌파들에 의해서 앞뒤 보이지 않는 ‘소주성 정책’, ‘수차례 갖다붙여도 더 엉망진창인 부동산 정책’으로 망가지고 있다.

정치논리가 아닌 경제원리로 풀지 않으면 안정적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기자는 지난시간 ‘미제스’에 이어 자유주의 사상의 원류인 ‘하이에크’의 저서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부디 향긋한 생각과 사상의 정리에 도움 되었으면 한다.

하이에크는 ‘사회적 정의’(또는 분배적 정의)의 허구성을 비판하는데서만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유사회와 양립할 수 있는 정치질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이미 논의했다.

그는 원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삼권분립이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유린하고 사회주의의 길로 가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그 원인을 법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그리고 제한 없는 민주정부의 결함에서 찾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추미애 사건, 옵티머스, 라임 펀드 사기 사건들을 돌아다보면 하이에크 사상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국가를 바로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지 불문가지라 할 정도다.

하이에크 사상의 정수를 찾아 경제사상의 타임뭐신에 올라타 보자! 모차르트를 탄생시킨 음악의 나라, 알프스의 장엄한 경관을 가진 나라로 알려져 있는 오스트리아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는 經濟學派(경제학파)가 태동한 곳이다.

바로 「오스트리아學派」로 불리는 學派가 그것이다. 이 학파는 오스트리아의 멩거(Carl Menger)로부터 시작해서 뵘-바베르크(Eugen von Bo¨hm - Bawerk), 비저(Friedrich von Wieser), 미제스(Ludwig von Mises), 슘페터(Joseph Schumpeter),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로 이어지고,

그 후 미국의 뷰캐넌(James M. Buchanan), 로스바드(Murray N. Rothbard), 커즈너(Israel M. Kirsner), 모스(Laurence S. Moss)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스트리아學派는 자유주의의 가장 철저한 옹호자일 뿐만 아니라 대처와 레이건 이후 각국의 經濟 개혁에 思想的 토대를 마련해 준 학파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하이에크는 학문적 깊이와 劇的(극적)인 인생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學派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誌는 그를 가리켜 『금세기 경제적 자유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변자』라고 평가했다. 하이에크는 경제학자로서 화폐 및 경기순환에 관한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철학자로서 사회주의의 誤謬(오류)를 철저히 증명하고 자유와 문명을 가능케 하는 토대로서 自生的 질서와 文化的 진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논리적 일관성과 원칙을 옹호했던 하이에크는 時流에 便乘(편승)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의 화폐와 경기순환에 관한 이론은 그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케인즈가 名聲(명성)을 날리고 있던 시기에 발표되었다.

하이에크는 케인즈의 오류를 지적했지만, 이미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케인즈를 뛰어넘기에는 力不足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사회주의는 반드시 崩壞(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그의 사회철학은 사회주의가 지식인 사회의 유행이 되어 있던 시기에 「挑發的(도발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무시되고 말았다.

생각해 보시라. 모든 사람들이 세계 경제의 구원투수로 나선 케인즈에 목을 매고 있을 때 그게 틀렸다고 말하는 젊은 경제학자가 얼마나 무모하게 보였겠는지를. 사회주의가 보편타당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 그건 반드시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외치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 것이었겠는지를. 하지만 옳고 그름은 다수결이나 분위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케인즈의 이론이 공격받고 허물어지는 것을 하이에크는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죽기 몇 년 전에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것도 지켜보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하이에크의 아들 로렌스 박사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 지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구요』이때 하이에크가 한 말은 간단했다.『거 봐, 내가 뭐랬어!』

사회주의자들의 팸플릿 통해 경제학 처음 접해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1899년 5월8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Wien)의 축복받은 학구적인 집안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이에크의 조상들은 거의 대부분 官吏로 일하였으나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父親인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는 나중에 빈 대학의 식물학 명예교수가 된 의학박사였으며, 祖父는 김나지움의 교사로서 자연사와 생물학을 연구했다. 동생 하인즈는 빈 대학의 해부학 교수가 되었으며, 막내 동생 에리히는 인스부르크 대학의 화학 교수가 되었다.

하이에크의 딸 크리스틴은 곤충학자, 아들 로렌스는 미생물학자가 되었다. 하이에크의 외조부인 프란츠 폰 유라쉐크는 대륙법을 전공하고 대학교수를 거쳐 高位관료와 오스트리아 통계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유명한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學派의 巨頭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는 하이에크 祖父의 친구였다. 어린 시절 하이에크는 아버지를 따라 알프스를 여행하며 식물을 채집하고 사진을 찍었다.

자연스럽게 그는 식물학과 古生物學, 進化論에 흥미를 가졌다(생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후일 그가 문화적 진화론을 펼치는 데 영향을 미친다). 하이에크가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과목들에 거의 흥미가 없었으며 숙제도 하지 않고 생물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업을 건성으로 넘겼기 때문』에 선생님들로부터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아서 두 번이나 轉學을 가야 했다.

1917년 3월 하이에크는 군대에 입대하여 오스트리아軍 砲兵장교로 근무했다. 그는 敗戰을 경험했으며 군인이 실제 전투보다는 허기와 질병으로 인해 더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패전의 공포와 飢餓(기아)의 고통을 겪은 젊은이가 찾아 나선 출구는 무엇이었을까? 더욱이 그가 군대에 있을 때 러시아에서는 레닌이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지 않았던가. 전쟁의 폐허로부터 新세계를 渴求(갈구)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에 魅力(매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처럼 하이에크 역시 사회주의에 매력을 갖게 되었다.

하이에크가 최초로 경제학을 접하게 된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정치 팸플릿을 통해서였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처음에 나는 모든 젊은 지식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온건한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공부를 시작했을 때 … 이 세상의 수많은 불만족스런 문제들에 대한 知的인 해결책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빈 大學에서 미제스와 만나다

하이에크가 경제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군대에서 先任장교로부터 사회주의 경제학에 관한 체계적인 文獻(문헌)을 소개받으면서였다. 그러나 경제학을 소개해 준 先任장교가 공부할 만한 대학까지 소개해 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1918년 군대를 마친 하이에크는 빈 대학에 입학한다. 사회주의에 매력을 갖고 있던 天才가 빈 대학에 들어가다니! (이 글이 연극 대본이라면 이 장면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비명소리를 삽입하는 것이 적절하리라!)

당시 빈 대학에는 자유주의의 巨頭들이 교수와 강사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칼 멩거를 계승하여 오스트리아學派의 지도적인 인물이 된 프리드리히 폰 비저, 보편 경제학의 창시자였던 오트마 스판(Othmar Spann), 오스트리아의 공무원이자 열정적인 자유주의자였던 루드비히 폰 미제스 등이 하이에크의 스승이 되었다.

특히 루드비히 폰 미제스는 하이에크가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유주의자가 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미제스는 「프리바트 세미나」라는 경제학 토론회를 이끌고 있었는데, 隔週(격주)에 한 번씩 商務部에 있는 미제스의 사무실에서 밤늦도록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다. 하이에크는 이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미제스와 친교를 나누게 되었고, 이러한 交分은 평생에 걸쳐 계속된다.

나는 사회주의가 해결책이라는 믿음으로부터 금방 벗어났는데, 그것은 내가 루드비히 폰 미제스의 직접적인 영향下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제스는 사회주의적 해결책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여준 위대한 저작, 「사회주의」(1922)를 출판한 바 있다.「사회주의」는 우리 세대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매우 느리게 그리고 또 고통스럽게 우리들은 그 책의 중심적 주장에 설득되어 갔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하이에크가 대학에서는 달랐다. 당시 빈 대학은 학생이 자신의 수첩에 담당 교수의 사인을 받고 수업료를 지불한 뒤 강의를 듣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하이에크의 학생수첩을 보면 법학, 철학, 경제학에서 개설된 모든 강의에 참석했음을 알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하이에크는 두각을 나타냈다. 입학 후 3년 만인 1921년에 하이에크는 법학 박사학위(Dr. jur.)를 취득했으며 그로부터 2년 후에는 경제학 박사(Dr. rer. pol.)가 된다. 학문에 푹 빠진 아들을 바라보면서 그의 어머니는 얼마나 기뻤던지 하이에크의 사진에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메모를 해 두었다.

프리드리히는 벌써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어머니뿐만 아니다. 미제스의 婦人 마르지트의 회고에 따르면 『남편은 새로운 학생을 만날 때마다 그들 중의 누군가가 제2의 하이에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였다』고 한다. 1928년, 경제 不況을 예측하이에크의 스승 프리드리히 폰 비저 역시 하이에크를 높이 평가했다. 하이에크는 두 개의 學位를 받고 난 뒤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는데, 이때 비저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슘페터에게, 동료 경제학자들에게 하이에크를 소개하는 편지를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슘페터의 편지는 「열려라 참깨」와 같은 것이어서 하이에크가 미국에 있을 당시 가지고 있는 돈이 바닥 난 후에도 접시닦이를 하지 않고 공부에 專念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하이에크는 1925~1928년 동안 경기변동에 관한 수편의 논문을 썼다. 20代 중반에 쓴 논문이었지만 촉망받는 경제학자로서 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논문들이었다. 1928년 하이에크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근거로 미국의 不況이 임박했다고 예언했다.

당시 세계 경제학계의 大家들, 예를 들어 미국의 피셔(Irving Fisher)나 영국의 힉스(John R. Hicks), 케인즈(John M. Keynes) 등은 1920년대의 好況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1927년 하이에크는 미제스와 함께 빈에서 「오스트리아 경기순환연구소」(Austrian Institute for Business Cycle Research)를 설립하고 初代 소장이 되었다. 이 연구소에서 하이에크는 경제 통계지표를 활용하여 화폐와 경기순환 사이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1929년 「화폐이론과 경기순환」이라는 첫번째 저서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하이에크는 갑작스런 信用增加가 재화들 간의 상대 價格을 어떻게 변화시키며 결국 지속될 수 없는 過剩投資(과잉투자)를 낳게 되는가를 보여주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 나온 직후 뉴욕의 株價(주가)가 폭락하고 世界大恐慌(세계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첫번째 저술이 출판되던 해 하이에크는 빈 대학의 경제학 및 통계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하이에크의 빈 대학 취임기념 강연은 바다 건너 런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경제학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젊은 경제학자 라이오넬 로빈스(L. Robbins)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서 劇的인 결과를 가져왔다. 런던경제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1900년대 初 런던의 에드윈 캐넌(E. Cannan)과 케임브리지의 알프레드 마샬(A. Marshall) 간에 벌어졌던 경제학의 基礎(기초)에 관한 논쟁이 있은 이후 지속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929년 런던경제대학의 경제학과장이 된 로빈스는 케인즈를 비롯한 케임브리지 경제학자들의 학문적 敵手(적수)가 될 만한 인물로 하이에크를 지목했던 것이다. 1931년 로빈스의 초청으로 하이에크는 1년 期限의 초빙교수로 런던경제대학을 방문한다. 런던경제대학에서 하이에크가 개설한 강의는 학생들로부터 旋風的(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로빈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적이 있다.

『저녁 시간의 강의는 선풍적이었다. 그의 강의는 어려운 것이었던 동시에 흥미로운 것이었으며,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기초적 모델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 강의는 하이에크의 학식과 분석적 재능을 보여주었는데, 이후 비버리지(런던경제대학의 학장)가 하이에크를 전임강사로 招聘(초빙)하자고 제안했을 때 滿場一致로 찬성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1년간의 초빙교수였던 하이에크는 런던경제대학의 碩座(석좌)교수가 되었으며, 1년 후에는 終身(종신)교수가 된다. 1950년 미국의 시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20년 가까이 그는 열정적인 학자로 활동했다.

코우즈(R. Coase, 199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를 비롯한 유능한 제자들을 가르쳤고, 미제스가 했던 것처럼 그는 경제 세미나를 매주 개최하여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런던경제대학 시절에 있었던 가장 「드라마틱」한 일은 로빈스와 함께 케인즈를 상대로 벌였던 치열한 논쟁이었다.

하이에크 VS 케인즈:長期와 短期

케인즈는 1930년 「화폐론」을, 하이에크는 1931년 「가격과 생산」을 각각 발간하였다. 하이에크는 「화폐론」을 비판하는 書評을 발표했고, 케인즈는 「가격과 생산」을 비판하는 論文을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하이에크-케인즈 논쟁에는 當代의 경제학자였던 로빈스(L. Robbins), 피구(A. C. Pigou), 스라파(P. Sraffa), 나이트(F. Knight) 등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힉스(J. R. Hicks)는 이를 하나의 「드라마」라고 하였다.

무엇 때문에 이런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을까? 두 책 모두 大恐慌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는 책으로서 고전학파의 貨幣數量說(화폐수량설:화폐량이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론)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각각이 제시한 공황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정반대였다. 케인즈는 침체의 원인이 「過少투자·過少소비」라 했고, 하이에크는 「過剩투자·過剩소비」라고 했다.

진단이 정반대라면 처방 역시 정반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케인즈는 政府가 적극적인 財政政策을 통해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했고, 하이에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市場의 調整能力을 신뢰해야 한다고 했다. 大공황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두고 어떻게 정반대의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답은 셋 중 하나다. 둘 다 맞거나, 둘 중 하나는 틀렸거나, 둘 다 틀렸거나.

필자는 둘 다 맞다는 쪽에 걸고 싶다(단, 長期와 短期를 구분한다는 조건下에서). 케인즈는 유머러스하고 話術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면한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는 短期的 처방을 찾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경제 현실이 불확실하므로 이론적 一貫性(일관성)보다는 상황에 따른 臨機應變(임기응변)을 중시했다.

누군가가 케인즈의 변덕스러움을 비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정보(Information)가 변하면 결론을 수정한답니다. 귀하는 어떻게 하시는데요?』 이에 반해 하이에크는 학문적으로 엄격했으며 겸손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현실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일관된 논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短期的 처방은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長期的으로 옳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하이에크는 케인즈가 결론을 쉽게 바꾸는 것에 대해 분노했던 반면, 케인즈는 하이에크에 대해 「논리 기계」라고 비아냥거렸다. 케인즈가 1936년 그 유명한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을 발표하면서 논쟁의 결과는 분명해졌다. 승리의 여신은 런던경제대학과 하이에크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케인즈의 처방은 주요 국가에서 채택되어 성공을 거두었으며 대공황 이후 1960년대까지 이 이론에 도전하는 이가 없었다. 닉슨 대통령은 『우리 모두는 케인즈주의자다』라고 선언하여 이런 분위기를 劇的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케인즈의 처방은 신통력을 잃게 되었다. 투자와 소비를 늘리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景氣活性化 대신 인플레이션과 失業을 가져왔던 것이다. 케인즈의 처방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뿐이며 失業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하이에크의 이론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케인즈는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短期的」으로 구원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長期的」인 眼目(안목)에서 자본주의의 作動原理(작동원리)를 간파한 것은 하이에크였다. 『長期에 우리 모두는 죽는다』고 했던 케인즈는 1946년 65세의 나이로 비교적 「단기적」인 인생을 마쳤지만, 하이에크는 그보다 훨씬 더 「長期的」으로 살면서(1992년, 93세까지 살았다!) 자기 이론의 妥當性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노예의 길」

하이에크와 케인즈의 논쟁을 보면 두 사람이 怏宿(앙숙)이었을 법하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경제학에 관해서는 서로 동의하는 것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에크는 16세 年上인 케인즈를 「영웅」으로 「존경」하였으며, 케인즈 역시 하이에크를 여러모로 배려해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런던경제대학은 케임브리지大로 피난을 갔는데, 이때 케인즈는 하이에크에게 케임브리지大의 킹스 칼리지에 연구실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1944년에는 하이에크를 英國學術院 회원으로 추천해 주었다.

케임브리지大에서 하이에크는 자신을 「大衆的」으로 유명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적 履歷(이력)마저 바꾸게 하는 책을 발간하게 된다. 하이에크는 1938년 히틀러가 빈에 入城한 직후 영국에 歸化(귀화)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회피할 수 없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 결과 집필한 책이 바로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 1944)이었다.

하이에크는 이 책에서 西歐 문명을 가능케 한 토대로서 個人主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개인주의는 개개인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개인의 견해를 至上의 것으로 인정하며, 개개인의 타고난 재능과 소질을 계발하는 것이 사회발전에 가장 理想的이라고 보는 신념이다. 自由主義는 이러한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일상생활에서 사회의 「自然發生的」인 힘을 많이 사용하고, 가능한 한 强制力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사상이다.
권병찬 기자 kbc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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